영천전투 승리 의의, 국군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감행 계기
적 15사단 4천여명 전사 하는 등 패하고 돌아가
영천전투 승리에 대한 국군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중에서 8사단 후배들의 자부심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자료 등 영천전투의 의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영천에는 전승 기념비가 두 개나 있고, 전적 기념비도 한 개 있다.이뿐 아니라 2002년에는 국립영천호국원에 영천전투 승전을 기념하는 대첩비를 세우고 매년 9월 중순이면 전국에서 모인 장성들과 노병들이 함께 자리하며 그날의 격전을 기억하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영천전투라 함은 시내를 중심으로 한 8사단 전투와 신녕 갑령(화산산성 일대)을 중심으로 한 6사단 신녕전투를 말한다. 자료에 나온 전투는 원론적인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이번 취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현재 생존한 실전 사병들을 중심으로 보도한다. -편집자 주
◆ 영천전투 개요
한국전쟁사에 나오는 영천전투 개요는 적 15사단이 경주로 계속 내려가기 위해 9월5일 국군 방어선을 뚫고 영천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하고 급기야 6일 새벽 3시에는 적이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했다.
이대로 영천이 함락하면 대구나 경주 포항도 모두 붕괴될 것이 뻔했다. 붕괴 직전 위기에서 유재흥 국군 2군단장은 결단을 내렸다. 우선 국군 8사단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해 적 15사단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그리고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해 7사단과 함께 영천을 공격토록 했다. 자신이 맡은 방어지역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마당에 1개 연대를 추가 차출당하게된 1사단과 6사단은 망설였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때부터 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낮에는 화력전, 밤에는 백병전 식의 처절한 전투가 3일 동안 계속됐다. 9월 9일 국군 2사단은 8사단 16연대와 21연대, 7사단 5연대와 8연대,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 등 영천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6개 연대를 모조리 공격에 투입했다.
북한군을 완전히 감싸며 포위망을 구축한 국군 2군단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국군은 일거에 영천을 완전 탈환하고 영천 북쪽까지 밀고 올라갔다. 적 15사단은 4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는 등 사실상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와해돼 버렸다. 이처럼 낙동강 전선 붕괴라는 최악의 위기 순간을 극적인 승리로 전환시킨 영천 전투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반격으로 전환 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이처럼 영천전투의 의의는 실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자료들은 당시 지휘관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므로 현장 전투에 참가한 사병들 증언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실제 참전한 노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녕전투를 설명하는 이순조씨
◆ 신녕전투에 참전한 이순조씨
이순조(80·영천시 작산동)씨는 고향이 신녕(신녕초등 해방1회 졸업생)이다.
“50년 8월 11일 입대했다. 영천초등학교에서 지원 입대했다. 당시 나이는 18세다. 영천초등학교에는 6사단이 주둔했다. 6사단 7연대 3대대 9중대 화기소대에 편성됐다. 11일 입대하고 훈련 없이 다음날 트럭 타고 의성 도리원 전투 현장으로 바로 갔다. 국군은 계속 후퇴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부대도 여기서 후퇴하고 있었다. 총은 M1을 받았으나 어떻게 한다는 말만하고 고지로 투입됐다. 8월말경 군위군 효령면에서 전투를 벌이다 신녕으로 또 후퇴했다. 신녕초등학교에서 집결했다. 화산을 중심으로 한 갑령 일대를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하룻밤 자고 신녕면 뒷산 화산(갑령 일대도 포함)에 투입됐다. 여기서 오래 동안 싸웠다. 이때까지도 총 사용이 겁났다. 6사단 7연대가 영천초등학교에 주둔하고, 6사단 2연대 19연대는 모두 인근에 있었다. 8월 말경 갑령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9월16일까지 싸웠다. 화산(화산산성) 전투가 유명했다. 갑령을 인민군은 못 넘어왔다. 이 바람에 신녕 점령을 못했다. 전투 현장에선 서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총을 쐈다. 당시 계급은 이등병이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몰랐다. 국군끼리도 얼굴도 잘 모르고 이름도 몰랐다. 아침을 얻어먹기만 해도 큰 복이었다. 갑령에서 호를 파고 있었다. 호에서 인민군이 보이면 무조건 총을 쐈다. 옆에 전우들은 인민군이 쏘는 포를 맞아 전사하는 전우도 많았다. 박격포 싸움이 대단했다. 화기소대라 박격포로 쐈다. 인민군도 박격포 비슷한 것으로 공격했다. 또 멀리서는 인민군 탱크도 보였다. 소총싸움도 많았다. 육박전은 없었다. M1으로 주로 싸웠다. 사격하고 진격하고 돌격하고 했다. 아군 비행기에서 탱크 등 지원 사격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갔다. 국군과 인민군이 함께 죽었다.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9월 16일 북진 명령이 났다. 군위군으로 해서 안동, 충주 6사단본부까지, 강원도 화천까지 가서 전투했다. 화천 전투에서 왼쪽다리 대퇴부 총상 입고 후송됐다.”고 회상했다.
인천상륙작전 참여를 설명하는 최염식씨
◆ 6.25참전유공전회 최염식씨
“영천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영천이 탈환되자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함흥까지 북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때를 같이 했다. 이만큼 영천전투가 중요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병들로 참전했기에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른다. 오로지 명령에 의해 현장을 누빌 뿐 전략, 전술 등은 거리가 멀었다. 현재 영천전투에 참전한 사람의 수가 20여명 정도인 것으로 안다. 그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현 탄약창 일대에서 교전이 치열해 인민군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고 했다. 당시 작산 사람들은 대창면으로 모두 피난 갔다고 한다. 이런 실화를 기록으로 남겨 교훈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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