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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 6.25 전쟁 발발 후 최초의 승리

영천시민신문기자 2014. 6.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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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전투, 6.25전쟁 발발 후 최초의 승리


영천 전투는 전쟁 발발 후 최초의 국군 대승이었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아주 중요한 전투이다. 후일 김일성은 영천 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50년 영천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는 영천전투를 포함해 크게 5개의 전투로 나뉜다. 호국의달을 맞아 보현산과 신녕, 영천을 오가던 영천지역의 격전현황을 전쟁기념관 자료를 토대로 되짚어 본다. (사진출처 : 국방부)

 

1. 보현산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8.13-9.4
- 주요지휘관 : 최덕신 대령, 박치옥 소령

 

청송 현동면의 구산동, 도평동, 월매동, 운계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에서 격멸당한 적 제766부대의 남은 병력이 아군의 경비망을 피해 보현산 북쪽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병력을 다시 집결시켜 후방으로의 침투를 노리고 다음 공격을 위해 증원부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청송쪽으로 침입했던 적 제 12사단의 일부 병력이 이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입암을 지나 내려왔다. 또 보현산지구의 적 제 766부대의 남은 병력도 적 제 12사단의 일부 병력과 합쳐졌다.
8월 7일 적은 유격전을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보현산 주변에 있는 아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영천전투 당시 8사단 21연대 장교들의 모습, 마지막 공세가 가해진 영천지역이다                                


아군이 열세였으나 8월 13일부터 9월 4일까지 무려 22일간 우세한 적을 억류하고 견제했는데 이는 험준한 지세를 잘 이용한 것과 필승의 신념 덕분이었다.
8월 15일 이후 적 제15사단이 이곳에 투입되어 전황이 극악의 사태로 치달았고 아군은 혈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패전으로 보기보다 승전한 영천지구전투의 전위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방어보다 공격으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단계의 전투였다.

 

2. 신녕 조림산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8.30-9.4 
- 주요지휘관 : 김익렬 대령, 함병선 대령

 

8월초 안강, 포항지구로 침투하려던 적이 의성 지구에서 입은 병력 손실 때문에 의흥, 신녕지역으로 진출했고 이에 아군 제 6사단이 적의 최후 공격을 저지했다.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분전난투를 거듭했던 제 6사단의 신녕 지구 싸움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야욕을 완전히 수포화시켰던 전투였다.
특히 9월 4일에는 제 19연대의 1대대가 화산동 깊숙이 숨겨놓은 적의 전차 8대를 발견하고 특공대를 파견하여 모두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열차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신병들

 

3. 신녕 화산지구 전투

 

- 전투시기 : 950.9.6-9.15
- 주요지휘관 : 김익렬 대령, 허용우 소령


9월 4일 북한군이 영천을 점령하자 북한군 제 8사단이 신령으로 진출했고 아군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포병으로 방어했다.
9월 7일 조림산과 운산동에서 침입한 적 1개 대대 병력이 합세하여 공격했으나 아군도 포병의 집중화력으로 크게 이겼는데 유재흥 준장이 각 연대에게 되도록 많은 예비대를 보유하도록 지시했던 것이 승전으로 이끌게 된 이유였다.

 

                   영천전투 메모리얼 파크에 들어서는 전투 체험장


이날 제 7연대의 방어진에서도 2개 대대병력의 공격으로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는데 아군은 진지를 약간 뒤로 이동하고 전 화력을 집중 발포했으며 미 공군 전폭기의 지원 사격과 포병의 지원 화력 그리고 각 대대의 박격포 사격으로 적의 인해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8일부터 15일까의 전투에서 아군은 수차례 승전했으며 적은 시체를 버린채 황망히 퇴각했다.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장병의 사기는 충천했다.
신녕-화산 지구 전투는 신녕-조림산 지구 전투와 더불어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적 8사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북진반격의 기반을 마련한 전투이다.

 

4. 영천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9.5-9.13 
- 주요지휘관 : 이성규 준장, 고근홍 중령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을 감행 후 계속적인 퇴각으로 밀리던 국군은 8월 칠곡ㆍ왜관의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미군은 왜관지구, 국군은 다부동지구 신녕지구 영천지구 기계~안강 지구 포항지구에 방어선을 구축해 조직적인 방어전을 전개했다. 이 방어선은 아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국가의 국운이 걸린 최후의 보루였다.

 

새롭게 단장한 충혼탑, 마현산에 위치했다. 마현산 충혼탑은 51만에 철거됐다.


1950년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증강된 5개 연대와 전차를 앞세우고 제2군단 (군단장 준장 유재흥) 제8사단 정면으로 돌진해 영천이 함락되었다.
제8사단장 준장 이성규는 영천 북쪽에 21연대와 6사단의 16연대를 배치해 적의 증원 부대와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했고 아화리와 유상리 일대를 고수하도록 16연대와 1사단 11연대 적을 공격했다. 포항 전선에 참여했던 10연대도 긴급히 원대 복귀하여 작전에 참여했다.
국군은 10여 일간의 필사의 공방 끝에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여 9월 이전의 낙동강 방어선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퇴로가 차단당한 적은 포위망 속에서 큰 타격을 입고 일부의 패잔병만이 도주했다.
영천 전투는 전쟁 발발 후 최초의 국군 대승이었고 또한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 진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내 설치되는 전투 체험장


이 영천 대첩에 소요된 아군과 북한군을 비교해 보면 한국군은 병력이 1만 5천 명, 북한군은 1만 2천 명으로 한국군이 많았다. 화력은 한국군이 57㎜ 대전차포 6문과 곡사포 105㎜ 26문에 불과했지만[후에 미 제1기병 사단에서 증간된 1개 전차 소대 파견] 북한군은 76㎜ 대전차포 38문, 곡사포 122㎜ 18문, 전차 T-34 12대로 한국군보다 월등했다.
영천 대첩에서  전차, 박격포, 대전차포, 로켓포 등 수 많은 무기를 포획했고 사살된 북한군이 3,799명, 포로 209명이다.

최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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