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원 2차 집결지… 마상재공연 관람객 인산인해 |
영천서 5차례 열려, 마필산업연계 필요 |
조선통신사 행렬이 이어지면서 누적된 피로를 풀고 부족한 물자를 채우기 위해 열리는 전별연 가운데 가장 으뜸은 단연 마상재이다.
마상재는 말 위에서 행하는 기술이자 무예이다. 임진왜란 이후 무예의 다양화 필요성에 의해 광해군 때 훈련도감에서 정식 무예의 하나로 채택됐다.
말놀음, 곡마, 말광대로도 불리는 마상재의 시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무용총과 쌍영총 등에 기병전투장면과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 등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구체적 기록으로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1362년 7월 고려 무장이던 이성계가 원나라 군사와 싸울 때 말 왼쪽 옆구리에 몸을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기발한 기술로 적장의 창을 피했다는 대목이 ‘태조실록’에 나온다. 이는 여섯가지 마상재 동작 가운데 다섯번째 동작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이미 마상기예의 원형이 싹텄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다.
기록에 의하면 광해군 11년(1619), 살곶이(왕십리 부근) 들판에서 임금이 몸소 나온 가운데 마상재가 처음 펼쳐져 마상재인을 뽑았다. 그 후 훈련도감에서는 봄, 가을에 마상재인 선발 시험을 치렀으며 뽑힌 사람은 훈련도감의 3수군에 해당하는 무예와 겸하여 훈련받았다고 한다.
마상재는 무예를 넘어 기예에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를 원했다. 마상재는 안동과 영천에서 열렸는데 안동에서는 2회 영천에서는 5회가 열렸고 그 규모도 차이가 나서 영천에서 열리는 마상재를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마상재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렇다보니 1635년 인조 때부터 일본에서 마상재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시작됐고 통신사가 갈 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냈다.
18세기에 사신으로 간 박경행은 “전쟁터에서 총, 칼, 창이 들어오고 깃발이 휘날리며 북소리가 요란할 때 말에 몸을 숨긴 채 적진에 돌입하여 적의 깃발을 빼앗거나 적군의 목을 베어올 수 있는 날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우리나라에 4~5백명은 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지난 2월 둔치에서 정월대보름을 맞아 열린 마상재 모습
일본인들은 마상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이것을 모방하여 다아헤이본류(大坪本流)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들어 마상재는 급속히 쇠락한다. 총포 등 근대무기 도입에 따른 전술관의 변화로 국가적 관심에서 멀어졌고 순조 이후엔 민간 전승자도 거의 끊어졌다.
이렇듯 마상재의 역할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조명되면서 조선의 마상재 우수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영천이 제4경마공원을 유치하면서 말산업에 대한 기대심리도 커지면서 마상재는 영천과 말산업에 대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 영천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럼 말산업의 현실과 영천의 말 관련 사업을 알아본다.
우리나라의 승마산업이 침체기에 빠진 것은 100년정도 흘렀다. 1908년 순조 2년 국운이 다하면서 마조제가 폐지됐다. 그 후로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마필이 실생활에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경마와 일부 승마인들에 의해 명맥만이 유지 되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국방, 교통, 정보통신, 일반생활에 이르기 까지 마필을 이용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전 세계적으로 국민소득이 2만불을 넘어서면 곧바로 해양스포츠와 승마 등 고급 레포츠 시장이 급격한 성장세를 이루고 있다.
국민 소득 2만불 시대의 국가들은 마필 산업이 대개 GDP(국내총생산)의 1%정도(농림부 발표)를 차지하고 있다(미국 1%, 아일랜드·뉴질랜드 3%) .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일본은 약 8000개의 승마시설이 있다. 이를 인구비례로 따지면 우리나라엔 약 4000여개의 승마시설이 있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약 150개 정도의 승마장이 어렵게 운영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마필산업이 어려운 이유는 4가지 정도로 분류된다. 거리, 시간, 비용, 안전이다.
다시 말하면 멀리 있는 승마장에 찾아가서 승마를 하려는 것과 매달 고액의 승마비와 레슨비를 내야 한다는 부감담이다. 또 승마장의 보험이나 제반 사항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반면 경마공원 건립을 두고 있는 영천은 승마와 경마 등 마필산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조선통신사의 마상재를 연계하여 영천은 말산업의 오랜 역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전국 최대 규모의 마상재가 펼쳐진 영천을 더욱 알리고 이와 더불어 현재 추진 중인 각종 말산업과 운주산승마장, 휴양림의 입지를 견고히 해서 ‘말’하면 ‘영천’이라는 등식을 세워야 한다.
경북도의회 262회 임시회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조선통신사 영천마상재 축제 복원을 주장한 한혜련 도의원은 “한양에서 출발한 사행원과 지역에서 선발된 사행원들이 모이는 2차 집결지가 바로 영천으로 경상감사가 주최하는 국가차원의 전별연과 마상재 공연이 이루어졌다.
마상재는 ‘무예도보통지’에도 수록된 조선무예 24가지 기예중의 하나로 조양각 맞은편 금호강변에서 펼쳐져 관람객과 장사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지역축제의 장이 마련되기도 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면서 “도지사가 직접 관장하는 마상재를 중심으로 지역축제를 복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한다. 영천지역의 마상재 축제복원은 한일양국의 문화교류는 물론 아시아평화를 도모하는데 중요한 기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리고 “제4경마공원을 비롯해 경북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말산업 육성을 위한 신호탄이 될 수 있다.”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앞서 문화재로 먼저 등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607년 이후 200년이 넘게 한일 문화교역의 꽃을 피우며 평화의 세기를 이끌어 왔던 조선통신사 문화사업이 일본에서는 이미 지역과 국가적 축제로 정착시켰고 수년 전부터 부산에서는 또 하나의 문화사업으로서 인프라를 구축해 가고 있다.
영천은 조선통신사의 큰 획을 그은 마상재를 통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가고 있다. 지난해 영천에서 펼쳐진 마상재 재연을 보고 많은 시민들이 공감했다. 내년에 영천문화의 전환기가 되는 문화의 달 행사에서 통신사 행렬과 마상재 재연에 많은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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