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조선통신사 17차 례 왕례 마상재 인기 최고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영천시민신문기자 2014. 8. 7. 14:00
반응형

 

 

조선전기·후기 통신사 17차례 왕래…마상재 인기 최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조선통신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한일 양국은 평화의 사절단으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행렬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이에 영천시도 조선통신사 전별연을 개최한 영천을 알리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또 영천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1달 동안 문화공연이 열리는 2015년 문화의 달 행사의 초점을 조선통신사와 마상재로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가 재조명 되는 가운데 본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조선통신사와 영천의 관계에 대하여 7회 보도할 계획이다. 특히 통신사 행렬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열린 아리랑축제와 대마도와 연계성이 많은 영천출신 이순몽 장군도 재조명 한다.      <편집자주>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일본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조선통신사라고 불렀을 뿐 정확한 명칭은 통신사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신전기 통신사와 조선후기 통신사로 구분되며 전기에는 세종 10년인 1428년 처음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439년(세종 21년), 1443년(세종 24년), 1590년(선조 23년), 1596년(선조 29년)까지 5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현재 제7차 교육과정 하에 2002년부터 발행된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전기 통신사의 내용은 다루지 않고 후기 통신사의 내용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 통신사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대목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을 차출하여 1590년 3월6일 출발했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1591년 음력 1월28일 일본 교토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했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했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내놓아 조정에서는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1년 뒤인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서 조선과의 국교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을 소환하기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선조 40년)에 강화를 맺었다. 이것이 조선후기 통신사의 시작이다.
조선후기 통신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국경이 인접한 국가간에 이토록 오랜기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좋은 사례로 조선통신사가 평화의 상징이라는 의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현재 추진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정부, 부사 등 총 400~500명의 대규모 사절단으로 구성되어 조선의 수도인 한양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까지 약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다.


조선통신사 파견의 목적은 조·일 국교가 수립된 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했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후기의 통신사는 처음에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파견되었지만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그 역할이 사라지는 대신 문화적으로 선진 문물의 전달 창구로서의 조선통신사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데 육로를 통해 부산에 토착한 행렬은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육로로 이동했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했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그 외에도 일본 민중문화에 끼치는 영향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의 춤, 조선 가마, 필담창화의 시문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양산, 벼루, 미농지 등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일본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 가서 쇼군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여 곡마 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는 한일 양국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오랜 시간 이어져 오면서 19세기 중단됐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통신사 행렬에 있어 영천은 조선에서 중심역할을 하는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먼저 서울 창덕궁에서 출발한 통신사 행렬은 영천에 도착하여 전별연을 열었다.
전별연은 서세루(조양각)에서 금호강 둔치를 바라보면서 성대하게 열렸다.

 

지난해 11월 ‘조선통신사의 전개과정과 마상재의 영천문화브랜드전략’을 주제로 한일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 김정식 담나누미연구원장(전 3사관학교 교수)은 조선통신사와 영천의 관계에 대해 3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김 원장은 “신령에 큰 역참이 있어 마필이 잘 준비돼 있었던 곳이다”면서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물류의 중심지였다”며 영천의 지리 교통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영천성 복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영천만이 갖고 있는 전쟁사적인 배경도 있었을 것”이라며 “의병장 전투기록 등 영천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고 분석했다.

김기홍 기자

 

자료출처 :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 보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