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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옛 흔적 풍호정, 영천의 남쪽 관문 봉동

영천시민신문기자 2012. 11. 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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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동의 유일한 옛 흔적 풍호정
점차 농촌의 풍경 사라져
영천의 남쪽 관문마을 봉동 

 


마을의 면적만큼이나 넓고 시원하게 뚫린 왕복6차선 경북고속도로 진입로가 이 마을을 한 복판을 갈라놓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폭 4m가량의 지하 통로박스가 갈라진 이 마을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어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된다.
마을 안쪽 노인회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봉동 동쪽은 군부대가 농지를 가슴에 품고 등 뒤에는 빽빽한 공장들이 둔탁한 소음으로 이 마을의 작은 가슴을 더욱 더 웅크리게 하고 있다. 마을 가운데는 대형 차량들이 산업물동량을 실어 나르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어 농촌마을의 분위기는 저만치 비켜 앉아 있는 것이 봉동의 현재 모습이다.


봉동은 동쪽 채약산에서 흘러내린 북안천변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청제평을 사이에 두고 도남동과 구분 짓고 남쪽은 개봉산(開奉山) 일명 개방산이 낮게 감싸고 있다. 또 북쪽은 북안천이 동서로 흘러 작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면적 2.27㎢의 봉동은 인구 253명(남139, 여114)의 작고 아담한 마을이다.


봉동의 옛 이름은 봉강(奉岡)·봉곡·봉동(鳳洞)·예봉·봉골(奉谷) 으로 불려 졌다. 세종조에 성균관 학유를 지낸 서도(徐渡)가 이곳에 이주하여 살면서 예를 숭상함이 지극하다하여 예봉 혹은 봉강이라 불려 졌다한다. 또 고종 3년에는 서유대(徐惟岱)가 낙향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여 유생들을 가르쳤다. 정자 옆 우거진 대나무 숲에서 아침마다 봉황새가 울고 갔다하여 이후부터 봉동이라 불려졌다. 지금은 대나무 숲 흔적은 찾아볼 길 없으며 영천시 봉동 285번지에 당시의 정자인 ‘풍호정’(風乎亭) 이 겨우 쓰러져가는 몸을 지탱하고 250년 이후의 낙엽 지는 가을을 을씨년스럽게 맞이하고 있다.

김태우 이장이 풍호정 누마루에 걸터앉아 서 씨의 후손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영천IC진입로 우측 동향에 자리 잡은 이 정자는 정면3칸, 측면1칸 반규모의 팔작기와로 지어져있다. 전면과 우측에는 겨자각을 세운 헌함을 둘렀고 대청 오른쪽 기둥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대청은 누마루를 이루게 한 것이 큰 특징이다. 대부분의 고 건축물이 세상의 고난을 이기지 못해 소실되거나 재건되어 원래의 재 모습을 찾기 어려운 반면 이 정자는 풍상의 세월을 홀로 지탱하고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채 옛 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 정자를 지키기 위해 후손(서종훈, 72)이 애를 쓰고는 있으나 이 정자의 마당 가운데 홀로 서 있는 300년 된 회나무만이 그를 반기고 있을 뿐이다.


김대우 12통장은 “아직도 우리 마을은 영천에서 유일하게 통장선출을 하지 않는다. 노인정에서 만장일치로 지명하고 지명된 통장은 4년을 넘기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내려오고 있다.”며 예를 중시하고 있음을 내 비추었다.


그 외에도 이 마을에는 신당이 있었다는 ‘신당골’, 뒷일이라는 못이 있었다는 ‘뒷삐알’, 마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상여를 눈물을 흘려 움직이게 하여 정을 두고 돌아가는 길이라 지칭된 ‘정모랭이’ 등 수많은 옛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또 마을 앞 북안천 한 가운데 명주실 한 꾸러미를 드리워도 닿지 않는 깊은 우물을 파 두었다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백의 오랑캐를 수장시켰다는 ‘이(夷)웅덩이와 어녀’라는 전설도 봉동 마을의 이색적인 이야기 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봉동 마을도 역시 문명의 삽질에는 고스란히 몸체를 맡기고 있다. 도남공단에 이 마을의 서남쪽 어깨를 내어주어 (주)신영, 세원, 화진, 청아냉동 등 굵직한 기업체들이 호령하고 있으며 또 머지않아 채신동 일반산업단지 진입을 위한 도시계획도로에 동쪽의 허리를 내주어야 할 형편이다. 여기다가 봉동의 가슴에 속하는 노른자위에는 지난 6월부터 (주)신원건설이 106㎡(약33평)와 81㎡(약25평)의 ‘가와인’ 아파트 480세대를 건립해 오는 2014년 완공을 목표로 굉음을 울리고 있다.


이 때문에 봉동은 많은 몸체를 문명에 내 맡긴 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자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며 고운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는 이일랑(69)씨는 “세월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고 말한다.


원래 행정적으로 예곡면에 속해있던 봉동은 1914년 개편과 함께 주막동 일부와 합해 영천면에 귀속되어 있다가 81년 영천읍이 시 승격 되면서 새로운 이름인 봉작동으로 불려 졌다가 현재는 남부동에 예속돼 다시 행정동인 봉동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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