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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 징병 1기로 입소 1주일 훈련 받고 바로 전투 현장에 투입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10. 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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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 징병 1기로 입소 1주일 훈련 받고 바로 전투장에 투입

금호초등 영천고등학교 자리 국군 주둔, 최후 전투 준비

 

글 싣는 순서

1. 영천전투 - 1)신녕전투

2. 영천전투 - 2)영천시내전투

3. 국립영천호국원과 영천대첩비

4. 영천전투를 보는 포천8사단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5. 전쟁과 거리먼 거제포로수용소 설립배경  

 

 

허만봉 임고면 고천리 81세

 

입대는 50년 8월 16일 징병 1기로 해당돼 7월 18일 영천에서 소집이 있었다.

그때 안동사범학교 본과 3학년 학도병으로 입대하기로 하고 지원했는데, 동란으로 학교가 파기되고 임고로 영장이 나와 영장 따라 입대했다. 소집 장소는 임고면사무소, 영천군청에 모여 열차타고 대구농림학교(일종의 신병 훈련소)에 집결하고 훈련을 2받았다.

3일 받다 포병부대에서 학교 다닌 사람들은 별도로 차출했다. 그러나 다시 8사단 16연대 1대대 보병으로 지원해 전방 배치됐다. 1주일 간 받았다. 안동이 함락됐다. 그래서 의성이 가장 전방이었다. 8월 27일 의성군 단촌면에 배치됐다. 바로 전투에 들어갔다. 적 15사단이 내려왔다. 후퇴를 했다. 약 2주간 후퇴, 죽장까지 갔다. 기룡산까지 왔다. 임고면 황간 고천 단포로 후퇴했다. 우를못둑까지 배치됐다. 다시 장천 들까지 배치됐다. 정보를 수집하니 적이 영천 시내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완산동 역 뒤로 도동으로 후퇴 선이었다. 16연대 1대대가 도동으로 갔다. 영천출신이니까 측후병 활동을 했다.

나는 측후병으로 길을 안내 했다. 적들은 마차에 군수불자를 싣고 인민군은 행군으로 도로를 따라 경주 쪽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금호초등학교 집결이었다. 도동 ‘옹기굴’ 넘어 못이 있다. 여기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경주로 못가도록 적을 막고 우리는 황정보를 거쳐 신월로 금호초등학교 집결했다.

8사단 16연대 본부는 금호초등학교에 있었다.

9월 10일경 금호에서 나왔다. 총진격이다. 후퇴는 없다는 각오로 했다. 적은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유봉산에)죽방산이라 한다. 죽림사 자리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큰 전투였으며, 사람이 많이 죽었다. 오수동으로 가서 적을 섬멸하고 적은 도동으로 작산으로 도망갔다.

작산에서 산을 타고 북으로 계속 임고 황간 효동으로 영천댐 밑 오른쪽 산 밑으로 계속 적을 추적해 갔다. 1개 사단 정도였다. 탱크도 몰고 왔다. 적은 거의 다 소멸돼 가고 있는 시점이다.

포로 전사 등으로 섬멸됐다. 우리 공군에서 제트기(처음 나왔다. 우리 공군이 직접 운행, 미국 병사도 몰기도 했다) 지원을 많이 했다.

                             직접 운전하고 다니는 허만봉 당시 참전용사

 

8사단 중에서도 16연대는 후퇴를 했다는 오명이 있었다. 21연대(신녕 방면)가 호랑이 부대로 활약을 많이 했다. 용감하게 했다. 10연대도 안강쪽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사병이라 더 상세한 사항은 모른다. 인민군 15사단이 적으로 내려왔다는 말밖에는, 적의 복장은 우리 국방색과 광목 같은 것이다. 신발은 농구화, 머리에는 모자뿐이라 우리와 비슷했다. 총은 구식 장총이다. 우리는 우의와 배낭 모포는 아무것도 없었다. 총은 엠1 이다. 비가 그해는 많이 왔다. 북진할 때 미군 보급품이 나와 미군복을 입었다. 군화 양말 내의 우의 철모 담요 등을 지급받았다.

 

9월 14일경 운주산에서 적과 교전이 벌어졌다. 적은 계속 후퇴해 갔다. 우리는 밀어붙여 보현산까지 밀어붙였다.

정상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중 방망이 수류탄이 내 머리 뒤에서 떠져 죽었나 보다 생각했다. 산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위생병이 응급 치료를 해주었다.

영천성당 자리에 야전병원이 주둔했다. 여기서 대충 치료를 하고 수도육군병원(밀양 또는 울산)에 있는 곳이다. 밀양으로 후송됐다. 한 달간 입원했다. 척추 부근에 아직 수류탄 파편이 남아있다.

한 달 후 원대복귀 했다. 원대 복귀하니 우리 부대는 서울 교육대학에 주둔했다.

여기까지 찾아가 복귀했다. 이때부터는 상륙작전 후라 큰 교전은 없었다. 적 자체도 많지 않았다. 54년 3월 지리산 공비 토벌하러 가기도 했다.

 

 

김수태 북안면 유상2리(81)

 

대한민국 징집 1기다. 병무청에서 북안면 유상 2리로 영장이 나왔다.

훈련소에 가라는 것이다. 50년 7월경에 갔다. 영천군을 통해 영장이 나오고 영천역에 모여서 기차타고 갔다. 대구 남산국민학교에서 집결하고 훈련받았다. 1주일 받았다.

8사단 16연대 1대대 소속으로 바로 전투에 배치됐다.

의성국민학교에서 하룻밤 자고 걸어서 안동 밑까지 갔다. 기차굴 부근에서 박격포로 인민군들이 공격해 왔다.

박격포로 때리고 전차로 밀고 내려왔다. 계속 후퇴하고 청송으로 와서 보현산 까지 왔다.

 

집에서 돈 가지고 간 것이 비 맞아 말리려고 양달.음달에 놓으니 다 날아 가렸다.

올라갈 때 신녕 어느 못에 말이 많이 죽었다. 미군들이 폭격해 산에 불이 나고 있었다. 말은 인민군들 말이다. 인민군들은 말을 타고 곳곳에서 마차로 들어왔다.

인민군은 마차에 포를 싣고 들어왔다.

한 달 만에 보현산에 왔다. 1주일 정도 있었다. 보현산에서 기계로 갔다.

기계에서 전투를 했다. 인민군 부대가 상당히 힘이 셌다. 전차와 기관총으로 밀고 내려왔다. 계속 후퇴했다. 자양면 소재지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원각골짜기 안으로.

배가고파서 민가에 들어가 감자를 찾아 먹곤 했다. 앞산(기룡산으로 추정)에서 총소리가 갈겨 됐다. 벌바우까지 후퇴했다. 벌바우 양달에서 잠을 잤다. 이 일대 아군들이 휴식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고 밤에 행군했다. 오미동 뒷산까지 왔다. 저녁 암호로 서로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동네로 후퇴했다. 민가에 가서 밥을 달라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참전 당시를 증언하는 김수태 참전용사

 

오미동 뒷고개 도로에는 후퇴하는 아군이 즐비했다. 영천중학교(현 영천고자리)까지 이동해 집결했다. 8사단 1대대는 인원이 몇 안됐다. 보초를 섰다. 보초병은 단포다리까지 가기도 했다. 영천중학교에는 여러 부대가 집결했다. 부대 마다 다른 일을 했다. 병역 보충을 받았다.

인민군들이 내려오는 바람에 또 후퇴했다. 인민군이 한창 영천에 들어올 때다.

뒷동산(청구아파트 부근)으로 올라갔다. 도로 밑에 남문통, 영천교 다리가 있었다. 다리로 많은 사람들이 후퇴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후퇴하다 작산에서 담배 연기가 인민군에 발각돼 인민군들이 포로 공격해 왔다. 대구로 집결해라는 하는 명이 있었으나 집(북안면 유상리) 근처라 집으로 갔다.

 

집에 오니 피난민들이 꽉들어찼다. 동네안 저수지에 숲에 숨었다. 인민군이 이까지 들어왔다. 찾으러 다녔다. 음력 7월 23일(8월 말경) 집에 갔다. 집에 들어가 이틀 뒤 7월 25일 할아버지 제삿날 이었다.

총알 탄창 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 대구 등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왔다. 우리 동네까지 사람들이 많았다.

헌병대가 동네 있었다. (군 특무대) 평일에는 며칠 동안 산에 올라가 피해 있었다.

특무대에서 나를 찾으러 다녔다. 영천경찰서(현 창구동)에는 헌병대 본부가 있었다.

헌병대에서 부대로 복귀했다. 안동가라고 해서 안동 수용소로 갔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전투지로 복귀했다. 의정부 전방에 있는 16연대 1대대로, 동두천으로 해서 계속 진군했다. 연천에서 전투하고 휴전선 넘어 황해도 덕천리(현 황해남도)까지 진군했다. 수색대에서 있었다.

덕천리에서 전투하다 중공군을 만났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다. 서울밑에까지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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