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의 독립운동 각계각층에서 일어섰다
간절한 독립 희망
영천의 3·1 독립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읽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도시에서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변모했다. 이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중국의 만주와 일본의 도쿄·오사카, 미국의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해 통계상으로만 3개월 동안 7,509명이 사망했으며 1만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그렇다면 영천의 3·1 독립 만세운동은 어떠했을까? 산남의진 등 독립운동이 활발한 양상을 띠었던 반면 3·1 만세운동이 미미하긴 하였으나 시민과 학생을 비롯한 3·1 만세운동이 영천에서도 일어났었다. 제95주년 3·1절을 맞아 영천에서 일어난 3·1 독립 운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3·1만세운동은 3월 20일을 전후한 시기의 약 10일 간이 절정기였다. 영천지역의 3·1 독립 운동도 3월 중순부터 4월 말경까지 약 한 달 남짓 전개되었고, 신녕면과 영천면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전국적인 상황으로 볼 때, 3·1 운동의 계기를 만든 것은 개신교 및 천도교 지도층과 학생층 및 일부 유생들이었으나 그 항거 주체는 상인ㆍ노동자ㆍ농민들이었다. 영천지역 3·1 운동도 이와 유사하다.
◆ 구위준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15일 10시경, 18세의 구위준은 신녕면 화성동 신녕공립보통학교를 찾아가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게시판에 ‘대한독립’이란 글자를 썼다. 이는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 교사 박필환의 독립만세 운동
3월 16일 신녕공립보통학교 교사 박필환은 밤에 몰래 졸업생과 재학생들을 운동장에 불러 모으고 전국적인 독립운동 상황을 이야기해주며 독립의식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연설했다.
그런 일이 있은지 10일 뒤인 3월 26일 박필환은 동료교사 이석형과 친구 황응두와 함께 걷다가 신녕면 포교소와 경찰관 주재소, 면사무소를 지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수차례 외쳤다.
함께 가던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렬하게 외친 단독 만세운동이었다. 박필환은 34세의 젊은 교사로 경산군 현곡면 출신이다.
◆ 개신교 교인 김준운의 영향
신녕면에서 농사를 짓던 김준운은 개신교 북장로교파 교인이었는데 4월 6일 하천가에 모여 있던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 황정수 등 10명을 만나 4월 8일 신녕 장날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인원을 모으기 위해 곳곳을 돌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 학생 4명의 독립만세
구위준과 박필환의 영향을 받은 황정수, 김호용, 박칠성, 김해오 등 4명의 학생들은 신녕면 완전동 노영수의 집에서 황정수가 준비한 태극기를 마당의 나뭇가지에 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날 밤 9시경에는 황정수, 김호용, 박칠성, 김해오, 조율이가 매양동 노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중 조율이를 포함한 보통학교 학생 20여명도 이날 밤 11시 30분 매양동 동쪽 냇가에서 줄을 지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며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행진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당하고 관련자 18명은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그날 김준운도 붙잡히고 말았다.
조병진 지사
◆ 홍종현과 조병진의 만세운동
며칠 뒤인 4월 12일 영천면 창구동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신촌면 입석리에 살던 농부 홍종현과 지곡면 오산리에 살던 조병진이 영천장날인 4월 12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붉은 천에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적은 깃발과 태극기를 만들고 오후 3시 30분경 1000여명의 장꾼들이 모이자 현재 영천향교 부근에서 붉은 깃발을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모습에 짐꾼들과 학생들이 호응하려 할 즈음 순찰을 돌던 순사보 김배석에게 발견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홍종현 지사
◆ 여성 김정희의 만세운동
영천지역 3·1운동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영천면 과정동에 살던 김정희라는 여인이 부녀자의 몸으로써 만세운동을 벌인 일이다.
영천면 과전동의 최복암의 부인 김정희는 4월 12일 칼로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로 옷감으로 준비해 두었던 명주천에 한문을 섞어 ‘대한민국독립만세’라는 혈서 깃발을 만들고 과전동에서 창구동으로 통하는 도로를 오가며 1인 만세시위를 펼쳤다. 일경에 붙잡혀 온갖 고문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대구로 압송되는 중에는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외쳤다.
◆ 임고면 김낙헌의 만세운동
임고면에 사는 김낙헌도 목면천에 먹으로 태극기를 그려 넣고 한쪽에는 ‘대한독립만세’ 다른 쪽에는 ‘영천군 임고면 양평동 김낙헌’이라는 깃발을 만들고 장대에 깃발을 매달려는 순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만다. 김낙헌은 체포당하는 순간에도 ‘대한독립만세’를 여러 차례 외쳤다.
◆ 3·1독립 운동 주도 인물들의 수형량
독립만세운동으로 박필환은 징역 1월, 김준운은 징역 1년, 김호용은 징역6개월 집행유예 3년, 황정수는 징역 10월, 박칠성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 김해오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 조율이는 징역 4월 집행유예 3년, 구위준은 징역 4월, 집행유예 3년, 홍종연은 징역 1년, 조병진은 태 90도, 조재복은 태 90도, 김정희는 징역 8월, 김낙헌은 징역 8월에 처해졌다.
홍종현 조병진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5월8일
◆ 영천지역 3·1 독립 운동의 특징
영천지역 3·1 독립 운동은 학교 교사나 기독교인 등 지식층 인사들이 학생들을 주동하거나 이들과 연계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계획하였지만 농민, 수공업자, 가정주부 등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도 만세운동의 확산과 참여를 이끌어낸데 기여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은 대체로 희생자 수와 관공서 파괴수를 통하여 그 결과나 성과를 이야기하곤 한다. 영천지역의 3·1독립 운동은 일제와의 강력한 충돌 없이 전개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일의식이나 민족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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