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천 시

이육사 어릴적 백한서원에서 수학

영천시민신문기자 2016. 7.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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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어릴적 백한서원에서 수학

 

 

 

영천은 육사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육사는 1921년 17세 되던 해, 영천군 화북면 오동 안용락의 딸 일양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년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1922년까지)했다고 한다. 문제는 1934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으로 입교한 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들이 연이어 검거되고 이육사도 그 해 3월 20일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되었다는 점이다.

 


40세 되던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육사가 순국하자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고 이원창에게 유골이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1946년 1월 16일, 동생 원창의 집에서 대상을 지내고 원창의 셋째 아들 동박을 후사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후 10월 20일, 여러 지면에 흩어진 시고와 유고 등 20편의 작품을 모은 ‘육사시집’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하게 된다.

 

 


영천은 이육사,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서만석 등 독립투사들이 즐비한 고장이다. 특히 이원대의 순국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이원대는 1942년 가을에 체포되어 1943년6월에 총살되었다. 그는 끝까지 사형수의 안대를 거부하고 눈을 뜬 채, 독립만세를 부르고 총살당한 인물이다. 그의 체포과정을 밝힌 사람은 김학철이었다. 그는 1941년 12월 일본군 점령지대와 중국 해방구의 중간지대 유격구인 원씨현 호가장 부근에서 조선의용대 대원 30명이 무장선전대를 편성했다.

 

 

 

 

백현국 영동고 국어교사 겸  문학평론가

 

 

영동고 국어교사  그리고 일본군 점령 하에 있는 부락민에게 항일선전공작을 수행하고 본대로 돌아가던 중, 호가장 부락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친일파인 구장의 밀고로 이들은 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게 된다. 이 전투로 대원 박철종, 송일봉, 이만갑 등 4명이 전사하고 대장 김세광이 부상을 당했으며, 김학철(본명 홍성걸)은 다리에 부상당한 채 일본군에게 체포된 후, 석가장 일본 총사령사 감옥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그 헌병대 감옥에서 체포된 이원대(마덕산)를 만났던 것이다(야마모토가 김학철과 이원대를 만나게 해 줌). 그 후 감학철은 나가사키 감옥으로 다시 이송되었다(후에 그는 다리를 절단한다).

 

 


체포된 이원대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북경 일본 헌병대 간수(야마모토)를 통해 쪽지를 김학철에게 전했다. 내용은 자신은 대원모집 중에 신용순(유빈-일본 헌병대 소속 첩자)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며, 죄목은 ‘군사정탐죄’로 “나는 곧 사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포로로 잡혀왔으니 총살은 면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달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헌병대 통역원이었던 곽동수는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 이원대에게 큰 감명을 받아 조선의용대로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곽동수의 증언으로 이원대의 총살과정을 증언했다.(1943년 6월 17일 일본 헌병대 본부 후원에서 14명의 저격수에 의해 김석계와 함께 총살 당함.-북경시 동창호동 1호-육사도 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누군가의 배신, 밀고, 그리고 무장투쟁, 육사 역시 식민지 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됐지만 지금도 여전히 친일파들이 새로운 간신으로 득세하고 있는 현실이다.

 

얼마 전 영화 ‘동주’가 상영관을 별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도 1200만 명이 관람하는 호응을 얻었다. 영화 속이었지만 그의 시는 식민지 배경 속에서 잔잔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식민지 하 시인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가당찮은 짓이지만 식민지 후에도 육사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질문에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문학평론가)은 답변은 명쾌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을 것이며, 여전히 감옥에 드나들었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 것이다.

 

 


문단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2001년 중앙일보는 ‘미당문학상’을 제정하면서 친일, 친독재 논란을 의식한 때문인지 ‘미당문학상’ 제정의 변을 이렇게 남겼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미당이 우리 현대시에 끼친 공이 그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하다는 데 동의했고, 현 정부에서도 미당에 대해서는 시로 말해야 옳다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 사실에 유념하며 오랜 논의 끝에 상을 제정하게 됐다.”

 

 


그렇다면 현재의 ‘육사문학상’은 ‘미당문학상’에 비해 더 추앙받는 상이 됐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육사의 문학 성격이나 저항 정신은 간 곳 없고 문학판의 논리대로 상을 받고 있다. 그러니 문학판에서 ‘미당문학상’을 받은 자가 ‘육사시문학상’을 다시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상을 주려거든 육사의 정신에 물어봐서 떳떳해야 할 것이다. 무너져가는 백학학원이 육사의 정신 같아서 안쓰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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