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국내 최대 화학제품 물류센터, 서해탱크터미널

영천시민신문기자 2012. 3. 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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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대 화학제품 물류센터, 서해탱크터미널 정봉식 대표

 

 

유무기화합물 윤활유 취급
한국은 나프타를 원료로 활용하여 생산되는 화학제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5위권의 화학제품(에틸렌 생산량 기준) 생산 및 수출국이다.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산업고도화 및 선진화와 관련해 급증하고 있는 석유화학 원료 및 제품의 수요를 담당하는 한편 선진국 및 후발개도국으로 수출할 정도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울산·여천·서산 등지에 3개의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해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생산하는 대부분의 원료 및 중간재는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3개석유화학단지에서 생산되는 유·무기화학제품을 경인지역의 공급과 수요를 연결하는 물류센터 역할을 하는 회사가 바로 서해탱크터미널이다.

2012년 새로운 도약의 원년
서해탱크터미널은 유독성 위험물질인 유무기화학제품을 취급하는 경인지역 최대물류센터로 2001년에 설립되었다. 인천시 서구 당하동에 자리잡고 있는 서해탱크터미널은 2000t을 저장할 수 있는 지하저장탱크시설과 지상의 옥내외에 1만 드럼까지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메탄올, 에탄올, 에틸아세테이트, 아세톤, 솔벤, 벤젠 등 500여종이나 되는 거의 모든 유무기화학제품, 윤활유, 합성수지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1제품 1탱크 1배관으로 된 완벽한 저장설비와 Flow Meter가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고 정확한 관리가 보장된다. 또한 예약 입·출하시스템이 완비되어있어, 1콜(전화) 1클릭(인터넷)으로 24시간 접수 및 제품 입·출하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심야에 도착하는 운송차량 기사들을 위한 휴게실과 샤워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그러나 서해탱크터미널이 소재한 당하동 지역이 원당토지구획지구에 편입되어 회사를 김포지역으로 이전할것이라고 한다.
시설공사가 완공되면 올해 안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거의 두배 가까운 부지에 최첨단의 시설을 완공하면 현재보다 두배나 되는 저장시설을 확보하게 되어 서해탱크터미널의 새로운 도약의 원년이 될것으로 보인다.

                                       서해탱크터미널 정봉식 대표


공직생활 중 관련지식 습득
1947년 영천시 화남면에서 태어난 정봉식 대표는 화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산동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산동고등학교 2학년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구의 성광고등학교로 전학했다고 한다. 학교시절의 꿈은 교대를 나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71년 만기 전역 후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열악한 농촌상황에서 희망을 느끼지못한 정봉식 대표는 서울로 가면 뭔가 기회가 있을것 같아 72년에 무작정 상경을 했다. 그러나 정봉식 대표는 서울 역시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문래동에 있던 시립합숙소 등 여러 합숙소를 전전하면서 2년여 동안 주방기구, 페인트공장 등 여러 공장과 건설현장 등을 전전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상경할 때의 희망과 목표는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마음을 다져먹고 한달동안 독서실에서 공무원시험 공부를 했다. 다행히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부천시에서 소방직, 건축직공무원으로 거의 1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하였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소방, 건축에 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고 위험물관리자, 방화관리자 등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편안하게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에 도전을 거듭해 왔던 정봉식 대표는 이번에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사업가로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알수록 길이 보인다는 정봉식 대표의 인생철학이 그를 새로운 도전으로 나서게 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익힌 건축부문의 지식과 경험이 있었기에 공장건설과 주유소허가 및 건설을 위주로 한 사업은 성실하고 정직한 그를 신뢰하는 많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발전을 거듭했다. 투자자들에 대한 정직한 이익배분이 투자자들의 신뢰를 지속시킨 가장 큰 요인이었다. 대형주유소를 4개나 직접 경영하던 정봉식 대표는 1997년 주유소허가제가 등록제로 바뀌면서 시장여건의 변화를 감지하게되어 서서히 업종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사업은 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는 정봉식 대표의 지론대로 2001년, 정봉식 대표의 전공분야인 독극물인 유·무기화학제품의 물류를 담당하는 서해탱크터미널을 창업하게 된것이다.

남다른 고향사랑, 모교사랑의 주인공
정봉식 대표는 그동안 재경영천향우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각별한 고향사랑을 보여왔다.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질 못하는 셩격인 정봉식 부회장은 항상 뒤에서 소리없이 향우회를 지원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동안 화남초등학교 동창회장과 산동중고 동창회장을 역임할 때도 말없이 고향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2009년에는 모교인 산동중학교에 학교발전기금으로 1억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전부터 후배들을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꾸준히 해왔고 특히 지난 2005년에는 산동중학교 재학생 전원을 서울에 초청해 2박3일간 청와대를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경복궁, 63빌딩을 견학시켜주기도 했다.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과 일에 대한 철두철미한 세밀함과 성실함이야말로 정봉식 대표의 오늘의 성공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사업에만 몰두하다보니 어느덧 일흔 나이를 바라보게되고 1남 3녀의 자녀들이 모두 결혼하여 손주만 해도 8명이나 되었다면서 서서히 현역에서 은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말단사원부터 시작해 현재 회사의 중요업무를 도맡고 있는 아들인 정병희 부장에게 혹독한 경영수업을 시키고 있으며 올해말까지 회사이전이 완료되면 본격적인 경영승계를 할 계획이다. 회사업종 자체가 항상 긴장을 해야되는 위험물관리업종이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철저한 관리 자세가 중요하여 이부분에 역점을 두고 승계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1975년 결혼한 이후 사업에만 몰두하여 고생만 시킨 부인을 위해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최동필 서울본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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