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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무장 김완 장군 추모… 왜곡된 모습에 방송국 항의

영천시민신문기자 2018. 7. 3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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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무장 김완 장군 추모… 왜곡된 모습에 방송국 항의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 동린각



임고면 삼매리에 위치한 동린각(東麟閣)은 자양서당과 나란히 서 있다.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큰 공을 세운 김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이다.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고 너른 마당에 잔디밭이 고르게 조성되어 있다. 입구 문화재소개 안내문을 옮겨 본다.


동린각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과 그의 부장 김완(金完)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자양면 노항동에 건립된 재사다. 자는 언수, 호는 사성당, 본관은 경주이며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서 출생했고 매년 4월에 추모식이 거행된다. 조선 정조 9년(1785)에 건물이 소실되어 2년 뒤(1787)에 재건되었으나 그 뒤 성곡동으로 이전 보수되었고 영천댐 공사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되었다.


동행한 영천향교 김달헌 전교는 “동린각 강당 건물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친필로 하사한 것이고 원래 이곳 강당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다가 후에 옆 사당건물이 생기고 나서는 옮겨 지내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사당(충의사)에는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저희는 음력 4월 초정일에 동린각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어요.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후손들의 산교육장이 되도록 하기 위해 ‘동린각보존회’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라 소개하는 김완 장군의 12대손 김제길(81) 씨로부터 김 장군에 대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동린각



“장군은 1577년(선조 10)무과에 급제해 1589년에 사도첨사가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합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등에서 우척후장을 했고 한산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는 척후장으로 활약했어요.”라며 “척후장은 함대가 출동할 때 본대에 앞서 나가면서 적의 상태를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는 장수로 그만큼 용감무쌍했고 그는 이순신과 함께 주요 해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고 1595년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소금과 미숫가루 500석을 비축한 공로로 이순신의 참모인 조방장이 되었죠.”라 열정적으로 술회했다.


이어서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 앞선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외양해전에서 일본 수군에게 패했고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적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1598년 일본에서 탈출, 그간의 우여곡절과 적국의 동태를 보고받은 선조로부터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시호와 표창, 그리고 함안군수의 벼슬을 받았다. 군수로 부임한 후 전쟁 때 부상한 군사들을 위로하며 백성들과 화합했고 1606년(선조 39)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저서인 해소실기와 공신녹권을 가문에서 전하고 있다는 설명까지 상세히 첨언했다.


KBS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인기리에 방영될 당시인 2005년의 일화가 재미있다. 어느 지역신문에 게재된 기사에서 ‘이순신의 최측근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완 장군에 대한 고증이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드라마 상에서 김완장군은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병장기에 녹이 쓸 정도로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후손들이 방송연출가에게 ‘장군이 영천출신이니 당연히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게 정상이고 인물의 성품이 왜곡되지 않도록 정확히 고증해야 한다.’고 항의한 일화다. 실제로 전라도 출신의 김완도 존재했지만 영천의 김완은 1592년 당시 41세, 전라도 김완은 15세였다고 한다. 연출가는 현재 묘사된 인물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어 갑자기 경상도 말씨로 바꾸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검색엔진에서 김완을 찾아보면 영천인물보다 전라도 김완 장군을 소개하는 글이 많다. 우리 지역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소개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박순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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