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영지사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20호
대창면 용호리에 천년고찰 영지사가 있다.
영지사에는 대웅전과 범종각이 유명하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20호와 문화재자료 제563호로 지정됐다.
영지사는 신라 무열왕때 의상조사가 창건하여 웅정암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병화로 소실되고 영지대사가 중창하여 영지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 영조 50년(1774)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지사내 5층 석탑과 대웅전
영지사는 구룡산과 오지산 십이봉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전통사찰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명부전, 삼성각, 요사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역대 주지 스님의 부도가 있다. 대웅전 건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자연장대석으로 기단을 축조하고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사용한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은 범종각과 더불어 1988년 9월 23일 문화재자료 제20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3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영지사 대웅전
주변 산세는 구룡산(높이 675m)을 중심으로 동으로 영천시 북안면, 남으로 청도군 운문면, 서쪽으로 경산시 용성면이 있고 그 산하 반용사는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의 탄생지로 유명하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대창면 용호리 14번지 영지사가 있다. 영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은혜사의 말사로 신라 천년고찰의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영지사 입구 범종각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타 사찰에 비해 영지사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과거에는 사찰입구 공룡발자국 화석 개천을 건너서 약수터가 있고, 범종각 하단을 지나 돌계단 딛고 언덕으로 오르면 바로 대웅전이 보이고 명부전이 있다.
지금은 범종각에서 절 입구 공룡발자국 화석까지 물도랑을 모두 복개 한 후 주차장으로 만들고 범종각 하단 길도 막아버리고 종각 옆으로 좁은 길을 확장한 것이 그 옛날과의 다른 점이다.
특이한 것은 범종각 현판에 범자가 타 사찰과 다른 뜰汎(범)자로 표기됐는데, 일부 방문자들이 성천 주지스님에 “왜 범종각 현판에 범자가 타 사찰과 다른 뜰범자를 사용하는지”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유는 과거에 범종각 하부로 물도랑이 있어 물에 떠 있다 하여 뜰汎(범)자로 현판 글도 그 당시 잠사라는 스님의 글이며, 범종각 상량 글에도 쓰여 있음을 설명하기도 한다.
범종각의 특징은 자연석 덤벙주초석에 초익공계 건물로 문루에서 아래로는 통로이고 위층은 범종을 단 누각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초에는 영지사가 아니고 웅정암이라고 하고 현재의 영지못(도화지)과 도잠서원도 없었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곤 지산골 탑마을에 민가가 있었고 일부 암자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절을 상징하는 탑의 상단부가 일제시대 때 지역파출소 정원석으로 쓰다가 해방되고 스님들이 탑마을 동네 논 중간에 방취된 것을 현주지 성천 스님이 하층기단석 2층을 제작하여 5층탑을 대웅전 앞마당에 터를 잡고 탑마을의 역사를 만들었다.
영지사 이름에 대해서 성천스님은 “1603년 2월 지산 조호익(문간공)이 당시 59세로 이곳 오지산 아래 지산촌으로 이사하여 숲과 샘이 좋은 곳 정자를 망회정이라 하고 사계절 흐르는 물을 막아 도화담이라 부르고 못가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달밤에 배를 띄워 학문을 가르치고 웅정암에도 드나들면서 큰절을 짓도록 하고 웅정암에서 대웅전을 건립하면서 靈芝寺로 영자는 神靈스런 영과 지는 지산골의 芝자가 합류하여 불려졌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영지사 대웅전 안에는 삼불외에 천정에 메달려있는 아주 작은 보살이 특이하다 이것은 바로 다른 절에 없는 악착보살이다.
아주 오래된 석조각
의미는 지혜의 끝을 악착같이 잡고 부처를 이룬다는 뜻도 있고 망자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데려가는 유일한 교통수단 반야용선에 매달려 잠시 볼일을 보다가 떠나는 배를 놓치자 때마침 인로왕보살이 끈을 던져주어 이것을 잡은 보살이 끝까지 잡고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합류한 것을 의미하는 대웅전 천정의 악착보살 상이다.
영지사는 사계절중 봄이 가장 아름답다. 절 어귀 치산마을에서 도잠서원까지의 폭3미터 도로가 그 옛날 고부랑 길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고 도화지와 도잠서원 수십 년 동안 못뚝에서 자라다 비바람에 넘어져 그대로 누워 물 안에 잠겨 물고기 쉼터가 되고 수면위의 고목나무는 그 자태를 포토존으로 각광받고 도잠서원 앞의 물가 수양버들은 고목나무 한가운데에는 썩어서 바가지 모양의 큰 구멍이 나 있어서 오가는 이의 걸음을 멈추게 하곤 한다.
또 못 안 영지사 입구 도로변 돌무덤은 일제 후 빨갱이 무덤이라 하여 지나는 사람마다 돌을 던졌던 50년 전의 초등학교시절 소풍단골 장소가 새롭게 기억나고 있다.
지난 4일 영지사에서 만난 동네 주민 조규홍씨(86)는 “어릴적 영지사는 대단한 절이었다. 영천에서는 최고 부자 절이었다. ‘영천군수할래, 영지사주지할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과 땅 재산 등이 많은 절이었다.”며 어릴적 기억나는 영지사를 간단하게 설명해 부귀영화한 과거 영지사를 짐작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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