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모 관

정채연을 그리며, 자랑스러운 6.25 참전용사 대전현충원에 영면

영천시민신문기자 2018. 1. 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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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채연을 그리며

                정채연 자랑스러운 6.25 참전용사 대전현충원에 영면


                 정채연은 1929년에 영천에서 태어나 6.25에 참전, 조국 근대화 역군으로 성실히 생활하며

                    3형제를 멋진 중견 사회인으로 성장시킨 뒤 2018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호국보훈의 달 특집 인터뷰 신문 기사를 다시 보며 그리운 정채연을 기억한다.

 


6.25참전용사 정채연 씨(90)- 입대 당일 전사한 고향친구의 마지막 모습 잊을 수 없어

“6.25 전투중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저격 능선에서의 육박전은 잊을 수 없습니다.”


6.25전쟁 발발 직 후인, 7월 18일 젊은 장정들의 입대권유 선무방송 차량들이 영천시내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대전동, 쌍계동의 고향마을 친구 13명과 함께 영천역에서 입영열차에 올랐던 6.25 참전용사 정채연씨(90.서부동).


                정채연 생전 건강한 모습 


그는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후퇴하면 발포한다는 아군 지휘관의 총구를 뒤로하고 시체를 방패삼아 둘러메고 고지에 올라가 육박전을 벌이며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피아간 병사들의 시체가 흙속에 섞여 썩어나가는 전장터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고 회상했다.


“저녁에 재편성된 1개 소대가 전투에 투입되면 이튿날 아침이면 10여명만 살아 남았다”는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그는 로켓포 파편이 터져 옆구리를 다쳐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중상을 입고 춘천야전병원을 거쳐 경기고교 운동장에서 군의관의 맨손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향 집에 전사 통지서가 통보되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한둘이 아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L-19 연락기들이 휴가병의 귀대를 독려하는 전단지를 살포하던 당시 영천군청 앞마당에는 입대 장정들을 무등 태우며 무운장구를 비는 전송행사가 연일 베풀어졌다며 입대당시를 회고 한다.


“가장 친했던 고향친구가 1950년 7월 입대 당일 적탄을 맞고 죽어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영천역에서 입영열차를 타고 입대한 그는 대구농고에 집결, 3시간의 제식훈련 후에 대구역으로 이동해, ‘눈 감고 쏘지말라’는 등 간단하게 M-1소총 다루는 법을 교육받고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이미 적 수중에 떨어진 안동을 뒤로하고 길안천 건너편 강변에 배수진을 친 그날밤 야간전투에서 바로 옆에 있던 절친이 전사했다.


마현산에 있는 영천전투 전승비, 육군1205부대에서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세운비


“입대하면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던 그 친구의 가슴을 아무리 눌러도 콸콸 쏟아지는 피는 막을 수가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이날 밤 전투에서 같이 입대했던 고향 친구중 3명을 잃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3년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 친구의 부모들로부터 멱살을 잡히며 “왜 혼자 살아돌아왔느냐는 원망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첫 전투이후 보급이 끊기고 실탄도 떨어진 상태에서 3일동안 사투를 벌였던 영천 인근 안강전투에는 결사대로 참전했다. 그는 안강전투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진 72명의 당시 결사대 참전용사중 현재까지 생존한 유일한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수냉식이었던 기관총의 총열이 달아올라 총알이 바로앞에 떨어질 정도로 죽도록 싸웠던 안강전투 등 전선을 옮겨가며 주요 전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그는 또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강추위속에서 박격포탄을 하늘에 쏘아 낙하후에 생긴 구덩이에서 추위를 견디며 전투를 벌였던 개마고원 전투와 수도군단 1연대 소속으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도 참여했다.


전쟁이 끝났어도 병력이 없다며 전역을 시켜주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명예제대했다는 그는 전역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했다. 상이군인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기 위해 상이군경증을 반납해 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입대했던 이후에도 고향친구들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평생 또래 친구 없이 살아왔다.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죄책감 등 평생 전쟁 트라우마로 고생하며 평소 말이 없다는 그는 지금도 전쟁 얘기만 나오면 열변을 토한다는 것이 가족들의 전언이다. 가족들은 또 보훈기장을 훈장으로 알고 애지중지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국립영천호국원내 있는 영천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영천대첩' 기념비, 기념비는  국가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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