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천 시

권태신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

영천시민신문기자 2012. 1. 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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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신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

매사에 최선을 다하면 후회 없는 삶 이룰 것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는 각종 불필요한 규제개혁을 통한 기업환경 개선과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 공공부문개혁을 통한 경제전반의 효율성 제고, 투명성 제고 및 국제신뢰도향상을 통한 외국인투자유치 증대, 법제도를 선진화하여 선진일류국가 도약을 위한 사회적 자본 확충을 통한 성장잠재력과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업무를 담당하는 대통령직속의 자문기관이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의 상근부위원장으로 실질적인 책임자인 권태신 부위원장은 1972년부터 4년6개월 공군장교로 근무한 후 1976년 행정고시(19회)에 합격하고 1977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출발하여 경제협력과장, 재정경제부장관 비서실장, 국제금융국장, 대통령경제정책비서관, 재정경제부 차관을 거친 후 장관급인 주OECD대표부 대사, 국무총리실 실장을 지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우리 고향 영천의 자랑스러운 향우이기도한 권태신부위원장을 사무실로 찾아가 얘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권태신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


- 금호에서 자랄 때 어린 시절 옛날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공군에 복무하시던 부친(권성근 장군·소장예편)을 따라 초등학교시절 서울, 수원, 대구 등지로 7번이나 전학을 다녔습니다. 전학 다닐 때마다 텃세 때문에 싸움을 자주해 힘들었던 기억이 남는다. 금호에서 태어나 저학년시절 금호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어릴적 금호에서의 추억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셨는데요. 재학시절 얘기를 좀?
“경북고 2학년 1학기까지는 사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9인회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멤버 중에 알만한 이로 강재섭 전의원, 문동후 평창올림픽조직위사무총장이 1년 선배였고 김범일 대구시장이 1년 후배였지요. 등산과 영어회화를 열심히 했었고 당시 부친이 수원으로 전출하여 하숙할 때라 술도 마시고 하이마트라는 음악감상실에도 출입하곤 했었지요. 농땡이를 좀 친거죠. 그리고 당시 대구시내 남녀고교생들의 서클이었던 MRA(도덕재무장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2학년 2학기 때부터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작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책상다리와 다리를 자전거체인으로 묶어놓고 독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5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할 수가 있었지요.”

- 부친이신 권성근 장군과 같은 공군 장교로 군복무 하셨는데요, 그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공군장성으로 예편하신 부친의 강권으로 대학졸업 후 공군장교로 입대하여 4년 6개월을 복무하면서 고시공부도 하느라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행정고시에 합격해서보니 저처럼 현역군대생활 더구나 공군장교로 오랫동안 군복무를 한 동기생은 없었습니다. 당시는 공군복무를 강권하신 부친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랜 공직생활을 대과없이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군대생활을 하면서 길러진 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든 일을 원칙적으로 처리하고 길게 보는 시야를 길러주신 부친의 깊은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이 지금의 경제대국이 되기까지 우리나라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어온 정통 재무관료로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생활을 해오시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또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시면서 지켜온 좌우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동안 IMF구제금융위기 등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국민 모두의 역량을 모우고 합쳐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경제관료의 한사람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국제금융국장시절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를 발행하여 IMF구제금융에 따른 금융위기 타개에 일조한 일과, 국제업무정책관으로 근무할 당시 무디스의 한국의 국가신용평가등급을 하향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막고 당시 반기문 외교보좌관(현 UN사무총장)과 얼싸안고 좋아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어렵고 힘든 상황도 참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럴 때마다 가친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저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네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은 하늘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친이신 권성근 장군의 회고록을 감명 깊게 읽어보았습니다. 아버님과 관련되는 얘기 좀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살아계시는 부친얘기를 하는 것이 무엇합니다만, 험난하고 불행했던 우리의 근대사와 지금의 눈부신 발전과정을 다 보면서 살아온 역사의 산증인이 아니신가 생각합니다. 6·25동란 중이던 5살때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천비행장에서 공군조종사였던 부친을 만난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비행기가 있던 비행장과 조종사였던 부친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부친과 한집에서 살아본 기억은 별로 없지만 군인이셨던 부친은 항상 엄하고 무서운 분이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공직자로써 정도를 걸으면서 대과없이 살아온 것은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 고향방문은 자주 하시는지? 혹시 은퇴 후 귀향계획은 없으신지요?
“1년에 한번 정도 성묘때 외에는 고향인 영천에 자주 내려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고향이 영천이라는 사실을 잊어 본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고향 분을 만나면 반갑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은 옛날보다는 좀 여유가 있어 고향 분들 모임인 영친회에도 자주 참석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저는 아직 은퇴라는 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는 계속 일을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 마지막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고향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흔히 사람의 한 평생을 마라톤에 비유하지요. 성급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그러나 반드시 완주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골인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는 자기계발, 원만한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한번 시작하면 꼭 끝을 보는 독한 마음가짐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후회 없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동필 서울본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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