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천 시

해방둥이에 듣는다

영천시민신문기자 2015. 8. 1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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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과 봉사 실천, 정 넘치는 영천 돼야
                             이상근 영천시의회 부의장

 

 

                                                                 해방둥이 이상근


이상근 부의장은 “해방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지만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해방되기 직전 고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안다”며 광복 70주년의 소회를 밝혔다.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6·25전쟁을 떠올렸다. 당시 부모님을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이 부의장은 “고향인 자양면 보현리에서도 6·25전쟁이 워낙 치열하니까 살던 집에서 자양면소재지까지 피난을 내려왔다(그 당시에는 영천댐이 생기기 이전임).

 

비행기에서 총을 쏘는 장면과 국군과 인민군의 모습도 생각이 난다”고 기억했다. 그 당시 생활상에 대해 “그때는 정말 어려웠다. 덜 익은 보리를 베어 찧어 먹었고 산나물을 채취해서 죽을 쒀 먹었다. 요즘 사람들은 그때 어려웠던 시절을 까맣게 몰라.”라고 말했다. 그 시절에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의 물정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먹고 살기 바쁘니까 남북분담이나 나라 일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지”라며 “자양면 보현리에서 시내까지 장을 보려 나오려면 새벽밥을 먹고 출발했다. 교통편이 없던 시절이라 왕복 60㎞거리를 걸어서 다녔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산에 나무가 우거져 있지 않고 벌거숭이였다. 농사일하다가도 짬만 나면 산으로 갔다. 땔감을 많이 준비해 둬야 추운겨울을 날수 있어서다.”면서 “지금은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야생유해조수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지만 그 당시에는 벌거숭이 산에 돼지나 고라니는 구경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최근 시대상황과 관련해 인심이 너무 각박하다는 사실에 우려를 나타냈다. “돈에 너무 의존하는 사회가 되다보니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이 없는 삭막한 사회가 되고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내고 “남을 배려하고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정이 넘치는 영천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요즘 젊은이 현장에서 일하려고 하질 않아
                            남무웅 녹원아파트 경로당회장

 

                                                                  해방둥이 남무웅


 

광복이 되는 해에 일본에서 태어난 남무웅 씨. 서부동 소재 녹원아파트 경로당 회장을 맡고 있는 남 씨는 태어난 지 2개월여 만에 광복을 맞았고 부모님과 함께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일본의 탄광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과 해방된 후 갓난아기였던 자신을 등에 업고 배를 타고 귀국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고생을 했다는 말을 후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또 6·25전쟁이 나자 피난가야 한다며 사과를 잘게 썰어 말린 후 보자기에 싸서 피난 준비를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후 양계농장 등에서 일을 하다 현재 서부동 서문로타리 인근의 조그마한 금속회사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마감한 곳은 본촌농공단지 내 자동차부품공장이다. 환갑이 될 때까지 생산직 근로자로 산업현장을 지켰다. 직장생활로 돈을 벌어 3명의 자녀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님들처럼 교육열은 대단했다. 자녀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이제는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남 씨는 7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먹고 살기위해 일했고 힘든 줄도 몰랐다. 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고생을 엄청 많이 했다.”며 과거를 회상한 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조금 답답하다. 모두가 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 것만 좋아하지 생산직이나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아무도 하려고 하질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70년 삶을 책으로 엮으려고 하면 몇 권은 만들 수 있을 거야.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살기가 좋아졌지만 그 당시 우리는 나물로 배를 채웠다. 정말 살기가 어려웠다”며 “당시 상황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이야기 하면 ‘라면 삶아 먹으면 되지요. 왜 배가 고파요’라고 한다. 그때는 라면 같은 먹을거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국민학교 졸업하면 모두 농사일 도와
                                화북면 입석리 권석만 씨

 

                                                         해방둥이 권석만

 

 

45년생들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움직이고 있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싶다. 해방되는 해 태어나 6세대 6,25사변을 거치고 군 생활하고 지금까지 온 결과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고향은 용소리다. 군 입대전까지 있었다. 6.25때 피난 가지는 않았다. 삼창정도 까지만 간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 마치고 탄피 주워서 엿 사먹고 하던 일이 생각난다. 학교는 상송국민(초등)학교 다녔다. 전교생이 300여명으로 기억한다. 용소리 밑으론 자천국민학교에 다녔다. 상송국민학교가 10여 년 전에 폐교됐다.
당시는 집에 농사짓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최고였다. 군대 가기전 모든 친구들이 그렇게 생활하며 성장했다.
우리 3남 2녀 모두 국민학교 졸업하고는 농사를 지었다. 새마을사업할때 그 시절 열심히 했다. 논농사, 약초농사, (천궁 황기 작약 등) 약초농사가 다른 농사보다 소득이 좀 많았다. 군 가지전까지는 모두가 집에서 농사일을 했다.


66년도에 군에 갔다. 공장에 나간 친구들도 있었다. 인천 등지로 나가서 인천제철 등 쇠 만드는 곳으로 갔으나 적응 못하고 돌아오는 친구도 많았다. 15-6세 때.

먹을거리는 감자 옥수수뿐이었다. 사다 먹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점방에 나가면 ‘눈깔사탕’ ‘비스켓’ 등을 구경하기도 했다. 3원에서 5원정도로 기억한다.


자장면은 없었다. 자장면은 65년도 생긴 것으로 안다. 자천장에서 고구마 사먹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군대 제대 후 자전거 한 대를 구해서 열심히 하고 30년 동안 뛰었다. 그래서 내 두부 공장을 이루어 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산천은 의구하고 인걸은 간대 없다는 시조처럼.
지금은 공장(합동두부 완산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시골에서 들깨 농사를 짓고, 산에서 송이버섯 매출을 약 2천만 원 정도 올리고 있다. 같은 나이에 집사람이 뇌경색으로 몇 해째 고생하고 있다. 건강을 찾았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지금 젊은이들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열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생활해 나가면 자신의 목표는 모두 이룩할 수 있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권 씨는 사회활동으로 산림조합 이사.감사 3회, 영천농협 대의원, 영농회장(현), 대구경북연식품 협동조합 이사 20년, 새마을지도자 완산동 15년 등.
가족으로 동갑인 부인 박장수씨와 2남1녀, 손자손녀 모두 4명을 두고 있다.

 

 



                    월남전 참전으로 부상, 상이군경으로 살아
                            허진팔 금호읍 어은리 노인회장

 

 

 

                                           해방둥이 허진팔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영천시 금호읍 어은리에서 태어나 월남전에 참전한 몇 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어은리에서 농부로 살아온 허진팔씨.
일제강점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는 없지만 1950년 6ㆍ25전쟁은 5살 어린 허진팔씨의 기억에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전쟁은 시골마을인 금호 어은리도 피해가지 못했는데 동네 안에 국군과 인민군이 모두 무기를 들고 들어와 주민들이 모두 마을 앞산으로 피난을 갔었다고 한다. 피난처인 앞산으로 총알이 슝슝 날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며 휴전이 된 이후에도 산 근처에서 놀 때면 수두룩한 탄피를 자주 목격하곤 했다고 한다.
허 씨는 조부 때 부터 살아오던 땅에서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1968년 월남전에 파병되어 10개월 정도 복무했으나 차량전복사고로 다리에 부상을 입고 퇴역했다. 당시의 부상으로 현재까지 상이군경으로 살아오고 있는허 씨는 부상이 심하지는 않아서 젊은 시절엔 큰 불편이 없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리가 붓기 시작해 현재 시술을 위해 보훈병원에 예약을 해놓은 상태라고 한다.
농사를 한창 지을 때는 약 1만6,528㎡(5,000평) 정도의 농지에 주로 복숭아와 포도를 재배하고 소도 50마리 정도 먹였으나 현재는 노령으로 농사를 많이 줄여 소일을 면하는 정도이다.
40대였던 80년대 중반에는 10여 년간 새마을지도자로 활발히 활동했다. 당시 동네 숙원사업이던 잠수교를 건설했는데 정부에서 세면과 철근만을 지원받고 부족한 돈은 동네 공동 부지를 팔고, 집집마다 돈을 각출하여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허진팔씨는 “나는 평생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처자식과 함께 살아왔다. 자식들도 장성해서 제 길을 갔고 두 노인이 조용히 시골생활을 한다.”며 후세와 국가에 당부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젊은이들도 제 자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고 나라도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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