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징벌적 수업료에 빼앗긴 젊음-김대환 칼럼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4. 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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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벌적 수업료제에 빼앗긴 젊음- 김대환 칼럼

 

세계 최고를 꿈꾸며 질주하는 한국과학기술대학(카이스트)에서 사고가 났다.
재학생 2명, 휴학생 2명이 자살하고 교수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이스트(KAIST)란 학위가 대단해도 개인의 행복과는 바꿀 수도 비교할 수도 없음에 학사운영과 교과과정 및 장학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면 무조건 고쳐야 한다는 의견에 손들고 싶다.
전제는 물론 평양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다란 말이 있듯 학교사회의 교칙안에는 자퇴란 조항이 정해져 있다.
사실 카이스트 졸업생이라면 거의 묵시적으로 사회의 그 어떤 직장이나 정부 공공기관에서도 인정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렇게 실력자를 양산하기 위해 교육의 장 안에서도 이제 경쟁은 삶의 과정 중 전부가 되고 말았다. 종의 기원을 거치면서 밀림의 법칙은 인간사회에서 그 어떤 악성 세균이나 유전인자 보다 인간의 곁에서 편안하고 크게 자리 잡았다. 


우울과 외로움에 시달리다 극도의 고뇌로 결국 힘든 선택은 무한 경쟁이 잉태한 대 비극의 최후속에 꽃다운 젊음을 빼앗긴 것은 아닌지 사회의 곳곳에 만연한 경쟁은 유치원 교육에서 넘마의 욕심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미 대학 사회는 취업을 위한 경쟁의 장으로 변했고 상대를 넘지 못하거나 쓰러트리지 않으면 내가 딛고 설 땅과 살아남지 못한다는 비정의 장으로 고착화 되어 버렸다,
꼭 이렇다고 단언하긴 어려워도 부유층의 자녀들은 법학, 의학, 경영학과 예체능 쪽에 대부분 집중하며 어렵고 더 힘든 기초과학계열이나 공과계열의 대학에 집중할 일이 없다.
중산층과 그 이하의 학생들이 힘들고 어려운 계열의 카이스트에 입학하여 밤을 세워 공부하여 졸업 후 사회로 진출해도 그에 따른 보상은 법학, 경영학, 의학 전공자 수익의 수준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의 보상이 얇기만 하다. 이 시간도 숨 겨를 틈 없이 전국의 대학 공학도들과 카이스트, 포항공대, 서울공대, 한양공대, 인하공대생 등등이 연구에 몰두와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힘들게 공부하다 간혹 의대와 고시쪽으로 공부의 방향을 바꾸는 한국 대학생의 현실은 비참한 현주소 그대로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지어 나타난 문제점이라면 미래의 과학도들에게 돈과 연결된 학점의 굴레가 학생들의 목을 죄었고 수준 높은 교육의 질 하고는 거리가 먼 학점경쟁을 벌여 등록금 차등의 사슬로 사람을 약간 비굴하게 만든 제도가 문제점이 아닌가 지적한다.
가뜩이나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정서의 흐름이 경쟁과 효율만 운운하는 사회이다. 뭐 길거리에 커다랗게 걸린 현수막에도 예상되는 경제유발효과가 수치화되어 있다. 이렇게 큰 액수가 나의 개인 생활과 어느 정도의 행복으로 이어줄 것인지 의심스럽지.

경쟁의 연속으로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내가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 내 스스로를 던지는 극단의 비극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붉은 과제는 상대를 충분히 따돌리고 저만큼 앞서가도 더 열심히 달려라는 징벌적 수업료제(학점이 낮은 학생은 수업료를 더 내어야 하는 규정)의 주문만 쇄도한다.
냉엄한 현실의 규정과 조항 앞에 비극도 외면하는 사회의 현주소 속에 인간교육과 도덕, 국사교육과 국가관 등등의 참교육과 교육철학을 외침은 허공 속에서 이 시간도 메아리가 되어 혼자서 맴을 돌며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학생들의 공납금에 의론하는 한국대학들의 학교경영은 살인적 공납금이 될 수 밖에 없다.
일시 휴학하고 등록금 보탬의 아르바이트 나갔다 되려 다단계의 족쇄에 발목이 걸려 들고 극소수의 여대생들은 고수익 보장에 눈 돌렸다. 되돌릴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학생들의 의견이나 불만을 무시하는 학교의 태도는 폭발의 요소가 언제나 살아 움직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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